고성기 시조시인◇박혜진> 한평생 시조를 사랑한 시인이 있습니다. 제주문학의 아름다움과 시대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힘을 써오셨는데요. 최근 제주 시조문학의 발전을 위해 1억원을 쾌척하셨습니다. 수요 인터뷰, 오늘은 주인공인 고성기 시조 시인을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언제 시인이 되셨나요?
◆고성기> 초등학교 때부터 시를 썼어요. 결정적인 건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제가 쓴 시를 매우 칭찬해줬어요. 그때부터 마음속에 '나는 시를 잘 쓰는 사람이다'라고 생각을 해서 중학교도 문예반, 고등학교 가서도 문예반 활동을 했습니다. 대학 때는 '백파문학동인회'라는 걸 만들고 회장을 하면서 꾸준히 시를 썼고 대학교 4학년 때는 관덕정 인근 다방에서 시화전도 했습니다.
◇박혜진> 대학 졸업 이후 제주여자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 하셨죠?
◆고성기> 1974년 제주여자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을 했는데요. 당시 김공천 교장께서 굉장히 문학의 뜻이 깊은 분이에요. 이후 그 분이 제주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가시면서 저도 제주여고 교사로 불렀어요. 1983년에는 교장께서 저를 부르더니 "왜 우리 좋은 시조를 놔두고 자유시를 쓰느냐"고 호통을 치는 거예요.
국어 선생이라면 우리 민족혼과 우리 민족의 전통을 묘사하는 시조를 써야지 어떻게 자유시를 쓰냐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조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1984년 '제주시조문학회'가 결성됩니다. 창립 멤버 가운데 오영호 시인과 저만 살아 있고, 나머지 분들은 전부 돌아가셨어요. 제주 시조문학은 발전의 발전을 거듭해서 이제는 제주시조시인협회가 됐고, 회원도 40명이 됩니다.
◇박혜진> 등단을 1987년에 하셨어요.
◆고성기> 그때는 등단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지금처럼 이 신인상 제도가 아니라 천료로 '가을 단상'이라는 시조로, 정통 '시조문학'을 통해 등단했습니다. 저를 추천해 준 분이 우리 국어교과서에도 나오는 이태극 선생님입니다.
◇박혜진> 그렇군요. 제주도의 현대 시조가 뿌리내리기까지 많은 역할들을 하셨군요. 시조하면 굉장히 어려운 문학처럼 느껴지는데 어떤 매력이 있습니까?
◆고성기> 시조가 어렵다고 느끼는 건 정형시이기 때문이에요. 자유시는 자유분방하게 쓰고 싶은 거 쓰면 되지만 시조는 음수율의 정형시이기 때문에 음수율에 딱 맞춰서 써야 되거든요. 45자 내외로 음수율을 맞추는 게 굉장히 까다롭고 힘들죠. 그런데 우리 민족은 3.4조나 4.4조가 일상생활에서 늘 쓰는 리듬입니다.
예를 들면 '아주망 어디 가멘'이 3.4조, '이웃집 놀러 가멘'이 3.4조입니다. 생각하면 어려운 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굉장히 갑갑하게 생각해서 시조를 어렵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좀 어렵지만 조금만 시조 형식을 익히고 쓰다 보면 몸에 딱 맞아서 '이게 왜 우리 민족 정형시인가'를 알게 됩니다.
왜 그렇게 오래 이어져 왔느냐, 왜 이렇게 생명력이 기냐 한다면 이것은 우리 생활과 우리 혼에 딱 맞기 때문이에요. 갑갑한 게 아니라 딱 맞기 때문에 이어져 온 거죠. 그런 점이 시조가 전 세계적으로 아주 역사가 긴 문학 장르이자 우리 한국 문학으로서 가장 자랑할 만한 겁니다.
고성기 시조시인 ◇박혜진> 시조가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 또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느껴지네요. 그 많은 작품들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 소개해 주실까요?
◆고성기> 섬은 바다로 인해 고독과 단절의 공간입니다. 그래서 제주도민은 섬에 대한 애환과 섬의 아름다움을 주로 썼어요. 제 시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섬과 바다, 섬사람입니다. 제 첫 시집이 '섬을 떠나야 섬이 보입니다'입니다.
이 섬은 내 자신이기도 하고 고독과 단절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내 자신 즉 나를 떠나야 내가 보인다라고 하는 것이 이제 섬을 떠나야 섬이 보입니다. 이 시집은 시보다 시집 제목이 더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인용해서 씁니다.
두 번째 시집 '가슴에 닿으면 현악기로 떠는 바다'도 섬과 바다에 대한 노래예요. 세 번째 시집 '시인의 얼굴'은 섬과 바다를 떠나서 시인은 어떤 모습이어야 되는가를 중점적으로 한 시였고, 네 번째 시집은 '섬에 있어도 섬이 보입니다'입니다. 섬사람이 고독과 단절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다 다섯 번째 시집 '이제 다리를 놓을 시간'을 최근 냈습니다.
◇박혜진> 최근 시비(詩碑)가 한림항에 세워졌는데요. 소감이 남다르셨을 것 같은데요?
◆고성기> 시비는 한 번 세우면 아주 오랫동안 시비를 보는 사람들에게 굉장한 위로와 기쁨을 줘야 되거든요. 그리고 생명이 아주 길어집니다. 한림 비양도 도항선 타는 인근에 세워져서 비양도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보게 되는데요. 내가 죽은 다음에 기려서 세워주면 좋은데 내가 살아있을 때 시비를 제막하는 게 쑥스럽기도 했어요.
한림항에서 비양도 등대를 보며 어린 시절 꿈을 키워왔는데 시비를 세우면 한림항에 진 빚을 좀 갚는 게 되지 않을까 해서 참 좋습니다. 한림항 가시면 시비를 꼭 한번 읽어보고 느끼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박혜진> 선생님께서는 오랜 시간 교직에 몸을 담고 계셨는데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마음도 남다르실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고성기> 교직을 기피하는 분들도 많고, 교사가 너무 힘들다며 명퇴하는 분들도 많지만 저는 교직이야말로 가장 성스럽고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은 많이 벌지만 의사들은 매일 환자만 대하죠. 장사하는 사람들은 돈과 연결해 사람을 보죠. 하지만 교직은 매일 맑고 깨끗한 학생들을 봅니다.
물론 말썽 피우는 애들도 있지만 학생들이 말썽 피우는 것은 잘 보면 오히려 아깝고 귀여운 거예요. 말썽을 해결하고, 아껴주고, 가르치다보면 교직 이상 가는 직업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맑고 고운 인재를 행복한 직업이에요. 이 방송을 듣는 분들 중 선생님이 있다면 내 직업이 최고라는 긍지를 가지고, 애들을 가르치며 사랑해 줬으면 좋겠어요.
◇박혜진> 올해 늘물섬문학상을 제정해서 또 화제가 됐어요. 어떤 취지로 만들게 되셨는지도 소개해 주시죠.
◆고성기> 지금까지 늘 받으면서만 살아왔어요. 제주문인협회와 제주시조시인협회 회장도 하고, 문학으로 저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존경도 받는 등 늘 받기만 했는데 나도 뭔가를 베풀어야 되겠다 생각해왔습니다.
오래전부터 조금씩 모아온 돈이 올해 11월이 되면 1억원이 돼요. 1억을 보람있게 써야 할 텐데 하고 생각해오다 문학 활동에 쓰면 좋겠다 해서 섬을 노래하는 시조에 국한해서 작품을 공모하게 됐습니다. '늘물'은 김공찬 교장 선생님 저에게 지어준 아호입니다. 1억원은 앞으로 1년에 700만원을 내놔서 20년간 운영할 계획입니다.
고성기 시조시인◇박혜진> 문학상을 제정하시고 거금 1억원을 쾌척한다 했을 때 가족들 반응은 어떠셨어요?
◆고성기> 우리 애들이 다 먹고 살 만큼씩 해요. 그래서 아버지가 참 좋은 결정했다고 하고, 특히 아내는 '당신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일 중 제일 잘 한 일'이라고 온 가족이 좋아했습니다. 가족들에게 전적인 환영을 받아 전혀 부담이 없습니다.
◇박혜진> 다함께 축하할 일이 또 있는데요. 최근 '북한강 문학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셨어요
◆고성기> 월간 시사문단이라는 문학잡지사로부터 북한강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는데 상금도 과분하게 500만원이 걸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공적서를 쓰거나 추천인을 찾아다닌다거나 이런 식으로 해서 상을 받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는데 이렇게 알아서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혜진> 앞으로 어떤 계획 갖고 계세요?
◆고성기> 시집도 내고, 큰 상도 받았고 제 시비까지 세워졌습니다. 딱 하나 욕심을 부린다면 좋은 시를 써서 시집은 더 꾸준히 내고 싶습니다. 목숨 다할 때까지 차분하게 좋은 시를 쓰는 것만이 시인이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박혜진> 선한 영향력 후배들한테 보여주시길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고성기 시인의 유명한 시 '내 사랑 한림항'을 직접 들으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고성기> 내 사랑 한림항은 물빛보다 추억이 더 파랗다. 조개잡던 순이 보조개 물들면 다 잠기고 고깃배 두서너 척 꿈을 가득 싣고 떠나면 곧 실어증의 바다. 비양도 등대는 깨어 별이 되어 날고 물나면 낚시 드리워 시어 두어 개 낚아올렸다. 나이는 방파제로 누워 흰 파도만 삼키는가